허구적 창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므로 그 특성이 애매하다. 창작물이 허황된 내용을 전달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우선 경계해야 마땅할 것이다. 거짓을 수용한다면 그것을 정당화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창작물이 허구적이라면, 적어도 어떠한 교훈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인간의 말초적 욕구에 호소할 뿐이라면 그를 일시적으로 속이는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매력적인 사람과의 애정을 나타내는 애니메이션,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타인에게 보복하는 내용의 연속극 등이 있다. 이런 종류의 창작물은 예술이라고 불리더라도 고귀한 가치를 찾기 어렵다. 허구적 창작물로써 구현된 거짓 세계는 일시적인 도피처로 작용할 뿐 그것에 매몰되는 것은 미래의 행복을 빼돌리는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예술을 즐기는 수용자는 허구적 창작물에 대한 탐닉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허구적 창작물은 대개 유의미한 속뜻이 존재한다. 예술가는 일반인에 비해 이면적인 메시지을 설정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겠으나 외적 미학의 원리가 제약이 되어 순수한 속뜻을 변질시킬 수 있다. 따라서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적 형태는 참과 거짓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음악이나 추상 미술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가치 중립적인 요소를 통해 직접 정신적인 행복감을 발생하며 허구적 창작물의 필연적 결과인 집착이나 허무 등으로부터 자유롭다. 문학 중 허구적 창작물에 속하는 부분집합은 "그 다음 내용은 어떻게 되는가?"와 같은 집착, "나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와 같은 망상, 곧 허무를 유발하며 특히 표면적인 내용 중심의 창작물은 이를 즐기는 공동체 속에서도 내용의 진행에 대한 선호가 엇갈려 독자 간 내분과 배척이 종종 확인된다. 또한 소설 따위를 읽으며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는 행위로 의심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 과정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끊임없는 현실을 의심하는 비판적 사고에 배치된다. 모든 허구적 창작물 중 단연 최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저급 욕구에 해당하는 결핍 욕구를 자극하는 표현물이다. 예를 들어 그림이나 조각, 현대에는 3차원 모델의 형태로 아름다운 사람을 구현해 그것에 애정을 느끼도록 유도하는 것이 있다. 그림의 떡에 비유될 수 있는데, 사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실현 불가능한 환상을 주입시켜 벗어날 수 없는 집착에 처하게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개의 작품을 숭배하고 수용자 간 동질감 혹은 경쟁심을 느끼는 상황 그리고 사물을 그려 행운이 오기를 고대하는 심리를 이용한 부적은 원시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